강희정 교수의 ‘사막에서 핀 꽃, 석굴사원’

대한민국 독서대전 포항! 프로그램의 일환인 강희정 교수의 [사막에서 핀 꽃, 석굴사원] 강연이 2024년 5월 18일 14:00~16:00까지 포은중앙도서관 어울마루에서 있었습니다.강희정 교수는 서강대 동남아시아학 교수로 동아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데, 강 교수는 전문적인 연구자이자 동양미술, 그리고 동아시아 미술에 관한 저서와 글을 많이 쓴 학자라는 우정아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의 소개로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그 다음부터는 강희정 교수의 직접 기술 방식으로 서술을 하겠습니다.오늘 강의는 석굴 사원에 관한 것입니다.제가 ‘태어나서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두 권을 냈고 세 번째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 관한 ‘구원과 욕망의 교차로 실크로드를 가다’라는 부재로 책을 냈지만, 책에서 다룬 것은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인 석굴사원이었습니다.이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실크 로드 중에서도 가장 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심성을 나타내는 석굴 사원을 만들었습니다.동서 문명이 교차한 실크 로드에는 초원의 길·사막의 도·바다의 길이 있습니다.실크 로드는 멀리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로마 지역까지 이어지면서 실크 로드로 불린 이유는 초기에 실크 로드가 주로 교역이 됐기 때문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실크 로드를 포함하는 훨씬 많은 종류의 물품이 오간 그런 교역로입니다.그래서 실크 로드를 따라서 사람들이 오갔지만 특히 사막의 길은 낙타를 많이 사용했다.캐러밴 로드는 낙타를 끄는 대상이 다닌 것에서 대상의 길이라고도 불립니다.대상 도로를 중심으로 말씀 드릴게요.장안까지의 길은 실크 로드의 가장 핵심적인 길입니다.장안에서 출발하고 서역을 거쳐서 서 아시아 그리고 지중해 연안까지 내려가지만 그 길 속에 실크 로드와 중국을 잇는 길이 석굴 사원이 있는 곳입니다.하서 회랑으로 불리는 길로 가사이는 지역의 이름으로 회랑은 복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복도로 불립니다.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높은 산으로 구성되어 있어 결정되는 길만 갈 수, 그래서 복도 같다는 중국인은 하서 회랑, 또는 카사이 슈우 복도라고 부릅니다.하서 회랑의 도시는 둔황, 주천, 장액, 란저우입니다.하서주랑 관련 지명 중, 캐나다 욕심관이라는 것은 실크 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서방 세계가 이어지는 관문이지요.주천이라는 지명에서 츄쟈은 술 주(술)의 글씨로 그는 샘(샘)의 글씨입니다.그래서 술이 솟아나는, 즉 이런 의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주취안입니다.주취안과 광 액은 한무제 때 흉노을 무찌른 장군 곽거병과 관련이 있습니다.장액은 감초와 관련된 식혜라고 불리는 일도 있습니다.주취안과 광 액체에서 보듯이, 지명은 흉노과 관련한 장소입니다.노래 욕심관에서 하서 회랑은 중국의 한족이 다스리던 때도 있다면 다른 이민족이 다스리던 때도 있습니다.이른바 빼앗고 빼앗길 뻔 했군요.교역의 필수 경로였던 것으로 수렴되는 부 때문에 하서 회랑을 손에 넣고 싶었습니다.둔황 막고굴은 실크 로드의 개척자로 알려진 장 형태의 출사 도라는 벽화가 있습니다.긴 건물에서 2천년 이상 지난 지금 긴 건물로 실크 로드가 활성화되어 서역이 중국과 이어지고 있습니다.실크 로드의 주요 이용 고객은 상인과 구법 중이었습니다.상인은 실크 로드를 오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낡은 수법 중에서 불교가 전해졌습니다.둔황 막고 굴에는 구법 중의 벽화도 있습니다.구법 승려가 되서는 법 마사루와 현현장이 유명하지만 법 마사루는 AD390년대 불국기라는 기록을 남기고”하늘을 보면 날아가는 새 한마리도 없고 땅에는 벌레 한마리도 없다.나는 오로지 해골과 동물의 뼈를 믿고 길을 가”라고 말했습니다.현장(602~664)은 17년 가까이 2천 킬로미터를 여행하며 대당삼장성교서비와 서유기의 모티브가 된 대당서역기 등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다니던 길이 실크로드이고 석굴사원이 있는 곳입니다.실크 로드의 이름은 리히트 호펜다는 사람이 1877년에 쓴[중국]이란 책에서 처음 언급했다.중국에서는 대상을 통해서 주로 비단·철기·칠기를 수출하고 서역은 마와 포도 등을 수입하고 왔습니다.대상들이 죽음을 무릎을 꿇고 황량한 길을 오간 것은 오직 부를 축적하기 위했습니다만,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옆에 있어서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지은 것이 석굴 사원입니다.사막의 모래 바람은 하루 아침에 도시를 모래 속에 묻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고 타클라마칸 사막 근처에 살던 오아시스의 주민의 입에서는 사막 밑에는 도시가 묻히고 보석이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었습니다.리히트 호펜만 아니라 서양에도 이런 소문이 전해지다 시작합니다만, 이 시기는 서양이 식민지를 찾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서양의 많은 탐험가가 이 지역을 탐험하게 되고, 실크 로드라는 곳이 알려지게 되고, 동시에 인류 문명 첫 교역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알려진 것 중 가장 처음에 큰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이 어디였는가 하면 둔황 막는 굴입니다.19세기 말경 둔황 막고굴을 관리하던 왕도사(왕 바로원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16호 굴을 청소하고 있고 뒤에 17호 굴로 명명된 나가요 시동이란 것을 발견하고 거기서는 경전·불화·고 보시·기타 문서 5만 여건이 나왔습니다.이런 조케이동의 유물을 처음에 체크하고 은과 교환해서 가져간 사람이 오렐 스타인이라는 사람입니다.오렐 스타인은 헝가리인이지만 영국 정부의 지원으로 16년간 중앙 아시아를 탐험하고 유물을 가져가는 대가로 하고 뒤에 영국에서 경이라는 작위를 받게 됩니다.사실 오렐스타인 이전에 왕도사가 청 정부에 보고를 했지만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국은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두 번째 사람은 폴 펠리오라는 프랑스인입니다.폴 펠리오는 당시 24세였지만 13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 천재였습니다.중국어를 읽고 쓸 수 있어 유물을 선별할 수 있고 그 안에는 왕오 천축국전도 있었습니다.선별된 유물은 역시 은을 주고 교환을 하고 프랑스로 가져갔어요.둔황은 오아시스 지대입니다.그래서 숙박이 발달하면서 물류가 모였습니다.그래서 돈을 번 대상이 종교적인 마음으로 석굴 사원을 만들고 무사를 비는 기도를 하고 시주를 한 겁니다.막고굴은 366년 낙쥬은는 스님이 명사 산에 동굴을 판것이 시작입니다.명사 산(면 사상)은 말 그대로 모래가 우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모래와 모래 바람이 많아 이름도 명사야 마입니다.막고굴은 불교 석굴입니다.수많은 불상과 많은 벽화가 그려지고 있습니다.중국에는 석굴 사원이 많았지만, 둔황 막고굴의 특징은 오래 지속된 것입니다.오가는 대상이 꾸준히 후원했던 것에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막고굴 불상 중에서 미륵 보살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미륵 보살은 발을×의 글자로 삼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머리에 화불이라는 작은 불상이 있습니다.화불의 의미는 내세는 부처가 된다는 표시에요.구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미륵 보살입니다.중국이나 한국에 미륵 신앙이 융성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고 수행을 하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몇번이나 인생을 반복해야 보살이 되고 이후에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느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며 그것이 본생담입니다 인도에는 알려진 것만으로 천 종류의 본생담이 있습니다.그 중 대표적으로 많은 사람이 아는 본생담이 “시비 왕 본생도 “입니다.시비왕의 본생도도 막고굴에 있습니다.막고굴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만큼이나 중국화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중국적인 주제,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선의 세계, 귀신의 세계 이런 것들이 점점 그려지게 됩니다.아수라도 들어가고, 중국 사람들이 보는 여성 신선 중 최고라는 서왕모도 들어가요.강희정 교수의 막고굴 강좌는 서완모의 이야기로 끝을 맺었고, 마제사 석굴, 장액의 금탑사 석굴, 난주의 병룡사 석굴, 베제크릭 석굴사원을 거쳐 유럽인뿐만 아니라 일본인까지 합세해 유물을 약탈해 갔다는 이야기와 함께 쿠차의 키질 석굴 쿠마라지바의 이야기로 1시간 30여 분의 강의를 마쳤고, 질의와 응답을 끝으로 강연은 종료되었지만 강연 내내 머리를 놓지 않은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 인간들이 비로소 꽃을 피웠습니다.#2024 대한민국독서대전 포항SNS서포터즈 #2024 대한민국독서대전포항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대한민국독서대전 #문화체육관광부 #SNS서포터즈 #포항시